체감상 물가를 건드리면 반응이 더 빠르다
솔직히 밀가루 가격은 평소엔 잘 안 보이는데, 한 번 오르면 체감이 확 온다. 라면, 빵, 과자, 국수처럼 우리 식탁에 자주 오르는 제품들 가격이 슬금슬금 올라가는 구조라서 그렇다. 공정거래위원회가 국내 7개 제분사의 밀가루 담합을 적발하고 역대 최대 수준의 과징금을 부과한 것도, 이런 민생 품목의 민감도를 정확히 건드린 사건으로 보인다.
이번 사건은 그냥 “가격이 좀 올랐다” 수준이 아니다. 공정위 발표에 따르면 7개 제분사는 2019년 11월부터 2025년 10월까지 약 6년에 걸쳐 밀가루 판매가격과 물량을 담합했다. 과징금은 총 6710억4500만원. 담합 사건 사상 역대 최대 규모다. 예전 2010년 액화석유가스(LPG) 공급회사 담합 사건의 6689억원을 넘어섰다는 점에서, 공정위가 이번 사안을 얼마나 중대하게 본 건지 감이 온다.
7개 제분사가 왜 문제였나
이번에 제재 대상이 된 곳은 사조동아원, 대한제분, CJ제일제당, 삼양사, 대선제분, 삼화제분, 한탑이다. 이름만 보면 각각 따로 움직이는 회사처럼 보이지만, 공정위 조사 결과는 달랐다. 이들은 국내 B2B 밀가루 판매시장에서 2024년 매출액 기준 87.7%를 차지하는 과점사업자였고, 사실상 시장을 좌우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이런 시장 구조에서는 개별 기업이 가격을 정하는 척해도, 실제로는 서로 눈치를 보며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기 쉽다. 더 노골적인 건 담합의 방식이다. 공정위는 이들이 대형 수요처를 대상으로 가격과 물량을 맞춘 뒤, 중소형 수요처와 대리점 등 전거래처까지 담합을 넓혔다고 봤다. 총 24차례에 걸쳐 담합이 이뤄졌고, 대표자급과 실무자급 회합도 55회나 있었다. 이 정도면 우연한 가격 동조화가 아니라, 구조적으로 맞춰 움직인 것으로 분석된다.
원가가 오를 땐 빨리, 내릴 땐 늦게
이번 사건에서 특히 눈에 띄는 대목은 원맥, 그러니까 밀가루 원재료를 사실상 전량 수입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국제 원맥 시세가 오르면 제분사 입장에서는 원가 부담이 커지니 가격 인상 압력이 생긴다. 문제는 그 압력이 ‘시장 반응’이 아니라 ‘사전 합의’로 이어졌다는 데 있다.
공정위는 원맥 시세 상승기였던 2020년부터 2022년 사이, 인상폭과 시기를 맞추는 식으로 합의가 있었다고 봤다. 반대로 2023년 이후 하락기에는 하락분을 최대한 늦게 반영했다고 한다. 이 패턴은 소비자 입장에서 꽤 불리하다. 오를 땐 빠르고, 내릴 땐 늦으니 결국 가격은 위로만 밀리는 구조가 되기 쉽다. 실제로 담합이 시작된 2019년 12월과 비교해 2022년 9월 밀가루 판매가격은 제분사별로 약 38%에서 최대 74%까지 상승했다.
최소 상승률 ■■■■■■■■■■ 38%
최대 상승률 ■■■■■■■■■■■■■■■■■■■■■■■■■■■ 74%
과징금이 큰 이유, 숫자보다 더 무거운 맥락
과징금 6710억4500만원이 그냥 숫자로만 보이면 감이 안 올 수 있는데, 핵심은 관련매출액이다. 공정위는 과징금 산정의 기초가 되는 관련매출액을 약 5조6900억원으로 봤다. 또 다른 보도에서는 5조8000여억원, 검찰은 5조9913억원 규모로 파악했다고 나왔는데, 조사 단계와 산정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숫자에 차이가 있는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어쨌든 규모 자체가 엄청나다는 점은 분명하다.
더 무거운 건 이들이 이미 2006년에도 밀가루 담합으로 한 차례 제재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한 번 경고를 받고도 다시 같은 방식으로 움직였다는 건, 내부 통제나 시장 감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게다가 정부가 물가 안정을 위해 지원한 471억원의 보조금을 받던 시기에도 담합이 이어졌다는 점은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민생 물가를 잡으라고 준 돈이 시장 왜곡을 막지 못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 구분 | 내용 |
|---|---|
| 담합 기간 | 2019년 11월 ~ 2025년 10월 |
| 담합 횟수 | 총 24차례 |
| 회합 횟수 | 총 55회 |
| 과징금 | 총 6710억4500만원 |
| 시장점유율 | 87.7% 또는 88% 수준 |
가격 재결정 명령, 이번엔 진짜 효과가 있을까
공정위가 이번에 함께 내세운 조치 중 하나가 독자적 가격재결정 명령이다. 말 그대로 담합으로 왜곡된 가격을 정상 수준으로 다시 산정하도록 하는 시정명령이다. 이번이 역대 세 번째 적용 사례라고 한다. 2006년 밀가루 담합 때도 비슷한 명령이 있었고, 그 뒤 약 5% 가격 인하 효과가 있었다고 알려졌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꽤 중요하다고 본다. 과징금은 아프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벌금 내고 끝”처럼 받아들일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가격재결정 명령은 앞으로의 거래조건 자체를 다시 짜게 만든다. 여기에 3년간 밀가루 가격 변경 현황을 연 2회 서면 보고해야 하는 명령까지 붙었다. 사실 이런 사후관리 장치가 있어야 담합이 한 번의 이벤트로 끝나지 않고, 시장에 실제 변화가 생긴다.
“민생과 밀접한 품목에는 실효적인 행위가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적극적으로 경쟁을 회복하는 조치로서 가격 재결정 명령을 포함시켰다.”
이번 사건이 남긴 신호
이 사건은 단순히 제분업계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밀가루는 라면, 빵, 과자, 국수 같은 일상 식품의 기초 재료다. 원재료 가격이 오르면 그 부담은 결국 제조업체와 소비자에게 넘어간다. 그래서 공정위도 이번 사건을 “국민 생활과 밀접한 식료품 담합”으로 보고 강하게 대응한 것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지점은 공정위와 검찰의 속도전이다. 공정위는 평균적으로 담합 사건 조사에 300일 정도 걸린다고 했는데, 이번엔 약 4개월여 만에 마무리했다고 밝혔다. 이례적으로 빠른 속도였고, 전원회의 심의가 끝나기 전에 사건을 공개 브리핑한 것도 처음이라고 한다. 그만큼 이번 사안을 중대하게 봤다는 뜻이다.
나는 이런 사건을 볼 때마다 “시장 자율”이라는 말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 체감한다. 경쟁이 제대로 작동하면 가격은 수요와 공급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데, 담합이 끼어들면 그 흐름 자체가 왜곡된다. 결국 누가 손해를 보냐면, 밀가루를 사서 빵을 만들고 면을 뽑고 과자를 굽는 업체들, 그리고 그 제품을 사는 소비자다. 공정위의 칼이 이번엔 꽤 세게 들어간 이유도 거기 있다.

